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 (문단 편집) === 영광의 시대(1960~1973) === 대구상업고등학교 야구부의 강세는 1960년대 본격적으로 꽃을 피웠다. 1962년 [[정동진(1946)|정동진]]이라는 걸출한 포수를 앞세워 청룡기 준우승을 차지한 것을 신호탄으로 이 번에는 [[류영수]] 투수와 [[우용득]] 포수의 콤비를 앞세워 1968년과 1969년 다시 청룡기 준우승을 차지했다. 세 번에 걸쳐 이어진 준우승의 한은 이들이 모두 졸업한 1970년에 풀리는데 청룡기 우승으로 20년 만에 서울 메이저 대회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이대로면 대구상고 야구부의 독주 체제가 열리는가 싶었지만 하필이면 동향 라이벌 경북고가 득세하면서 대구상고의 독주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경북고는 1971년 전국대회 전관왕을 달성하면서 고교야구 전성시대의 최강자로 등극했고 대구상고도 그들의 라이벌이라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하며 [[강태정]] 감독의 지휘 아래 [[장효조]]와 김한근을 필두로 한 막강한 전력을 바탕으로 1973년 고교야구 3관왕을 달성하면서 그들이 한 시대를 지배할 가치가 있는 팀임을 충분히 증명했다. 그리고 1974년 세 차례 결승에 올라 봉황대기에서 우승에 성공하며 전년도의 영광이 결코 허명이 아님을 증명했다. 그들의 영광어린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인물은 [[김시진]]과 [[이만수]]였는데 불행히도 이 둘이 배터리를 맞출 때는 성과가 영 좋지 않았고[* 김시진과 이만수는 동갑내기지만 이만수가 중학교를 1년 유급하는 바람에 학번으로는 김시진이 1년 선배다. 여기에는 웃픈 일화가 있는데 이만수가 대구상고에 입학했을 때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김시진이 같은 학교라는 것을 알고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눈치 없이 "어? 시진아! 반갑데이~" 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선배들이 이를 보고 "어딜 버릇없이 선배한테 반말을 하느냐"라며 이만수를 두들겨 팼다는 일화가 있다.] 김시진이 졸업한 1977년에 [[박영진(야구선수)|박영진]]을 앞세워 다시 청룡기 우승을 차지하고, 1978년 [[양일환]]이 에이스로 뛰며 대통령배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영광스러웠던 시대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 시기 대구상고의 영광을 함께 만든 이들은 훗날 고향팀 [[삼성 라이온즈]]에서 뭉쳐서 혁혁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1980년대의 대구상고는 무려 [[양준혁]]과 [[김태한]]을 배출하는 등 인재는 나쁘지 않지만 팀 성적은 우승과 인연이 없는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고 결국 1980년대에는 한 차례의 우승도 차지하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 보내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